지정환

  • 지구 반대편에서 온 벽안의 신부 지정환 (1931.12.5~2019.04.13) 지정환 신부는 왜 벨기를 떠나, 한국에서 치즈를 만들었을까?

    국내 최조의 치즈(임실치즈)를 만든 '한국 치지의 아버지-지정환' 신부는 왜 벨기에를 떠나 지구 반대편 이곳 한국에서, 한국인들에게 전혀 생소했던 치즈를 만들게 되었을까? 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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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디에 세스테반스 (Didier t'Serstevens) - 지정환(池正煥) 1931.12.5~1963

    1931 벨기에 출생
    1952 벨기에 루벤데 철학과 졸업
    1958 벨기에 예수회 신부서품
    1959 한국부임
    1961~1963 부안부임 / 부안농민을 위한 간척사업

    벨기에 귀족 가문의 5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디디에 세스테반스는, 독실한 천주교 가문의 영향 속에서 "평생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 1960년 6월 한국전 발발 뉴스를 접하고 머나먼 아사이의 나라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된 후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을 부임지로 택했고, 평소 꿈꾸었던 '지도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친구' 같은 사목의 길을 한국에서 펼치게 되었다. 첫 부임지 부안에 도팍한 그는 농사는 커녕 막대기 하나 꽂을 땅도 없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과 함께 바닷문에 잠긴 땅을 농지로 바꾸는 개간사업을 진행했다. 익숙하지 않은 한국음식 탓에 불균형한 식생활을 하면서도 3년간 강도 높은 노동인 개간사업은 이어졌고, 그 결과로 100정보(300,000평)나 되는 논을 만들어 내었다, 마침내 3년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농지를 함께 고생한 100가족에서 나눠주는 기쁨을 얻었지만, 그동안 자신을 돌보지 못한 탓에 기능를 상실한 담낭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수술후 요양차 머물던 고향을 뒤로 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두번째 봉사지인 임실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 한국 치지의 아버지 지정환(池正煥) 1964-1981

    1964~1980 임실성당 주임신부 ( ~ 1969)
    농촌사목 지도신부( ~ 1973)
    신용협동조합 지도신부

    임실에 부임했을 때 기관장들과 함께 한 식사초대에서, 당시 임실군수는 '이 다음에 떠나실 때 임실군민 전체에게 뭔가 하나쯤은 꼭 남겨 주셨으면 한다'는 부탁의 말을 전했고 그 말은 그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게 되었다. 임실은 노령산맥 동쪽 사면의 산악지대로 숲과 들이 많고 경작지는 아주 적은 척박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임실 농민들은 고구마, 고추 등을 재배했는데, 수확한 돈을 겨울에 술이나 노름으로 탕진해 버려 가난과 굶주림이 대를 이어 계속 되던 곳 이었다. 가난을 한탄만 하던 이들을 위한 그의 첫 번째 노력은 신용협동조합 활동이었다. 단돈 1원이라도 술과 노름이 아니 라 가난을 벗어날 다른 일에 쓸 수 있도록 저축하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설득하였다. (조합 직원들과 함께) 노력한 결과 저축과 조합원,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가난한 임실은 가난을 스스로 이겨낼 방법을 조금씩 배워가 게 되었다. 그당시 그를 찾아오던 일부 청년들은 '같은 농촌인데, 왜 유럽의 농촌은 부유하고 한국의 농촌은 가난한가?'라는 질문을 했었다. 대답은 '벨기에의 농촌도 가난한 시절이 있었지만,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 이었다. 그는 '한국에도 바로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며 청년들을 독려했 고 함께 노력할 일을 찾자고 했다. 첫 시작은 산양이었다. 산양을 놓아 키우고 젖을 짜서 팔기 시작했다. 우선 그가 키우고 있던 산양 두 마리와 청년들이 구입한 산양을 시작으로 새끼를 낳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서 동참하는 사람들을 늘려 나가기 시작했고, 1966년 12월 산양협동조합을 만들면서 산양 사육을 본격화해 나갔다. 산양유를 팔기 시작했지만 워낙 수요가 적어 남아서 버려지는 산양유도 고민거리였다. 해결책으로 떠오른 것은 생전 듣도보도 못 한 치즈라는걸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967년 한국에서 최초로 임실에 치즈 공장이 탄생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치즈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문지식이 없던 치즈 만들기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우여곡절 끝에 얻게 된 치즈에 관한 책한 권으로 카망베르 치즈를 만들어냈지만, 실패는 계속 되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유럽 현지의 치즈 기술자들에게서 기술을 배워 오겠다는 결심을 했고, 1969년 8월부터 프랑스와 벨기에를 거쳐 이탈리아에 이르는 치즈 기술 교육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치즈 공장들을 견학하면서 그동안 실패했던 이유를 깨닫고 만드는 과정을 배웠고, 이탈리아의 한공장 기술자에게서 각종 치즈 제조법이 상세히 적힌 노트를 기적처럼 얻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년간의 실패와 3개월간의 유럽 여정은 헛되지 않았고, 마침내 치즈 생산에 성공하게 되었다. 감격의 성공 이후 공장은 나날이 발전하였고 치즈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산양은 젖소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1971년에 벨기에 천주교 구제회를 통해 치즈 가공기까지 무상으로 제공받아 가며 승승장구해나갔다. 처음에 프랑스식 포르살류로 시작한 치즈(제품명:정환치즈) 생산은 이후 영국식 체더치즈(제품명:성가치즈)와 모차렐라 치즈로 이어졌다. 생산된 치즈는 외국인 전용 상점을 시작으로 조선호텔, 신라호텔 등 유명호텔과 피자가게에 납품되었다. 호텔에 치즈가 납품되면서 공장허가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최초의 축산물 가공 처리법이 제정되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국내에서 최초로 합법적인 치즈공장이 허가받는 새로운 기록이 만들어졌다. 치즈공장이 안정되면서, 1972년에는 이사장직을 사암하고 그간 투자했던 자금과 공장 시설물 등 치즈공장 일체를 조합측에 양도하여 임실치즈협동조합을 탄생시킴으로 소유를 임실주민에게 넘겼다. 그 후에도 치즈의 생산 공정을 관리하며, 판로를 개척했고, 전라남북도를 오가며 신용협동조합 운동에 열중했다. 농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하도록 교육하기 위해서 였다. 1964년 임실에 부임한 이후 산양협동조합과 치즈공장을 만들었고, 임실치즈협동조합 설립과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했다. 정말 쉴틈 없이 바쁜 시간이었다. 이때 다발성신경경화증이 발병하였다. 1976년에는 증상 악화로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혼자서는 걸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몇 년의 바쁜 시간이 더 지나고, 임실치즈(임실치즈협동조합, 임실치즈 공장)가 홀로서기를 시작할 즈음인 1981년이 되어서야, 임실 군민의 삶을 바꾸기 위해 숨가쁘게 달려온 20여 년 간의 시간을 잠시 멈추고 치료를 위해 벨기에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장애인의 친구 - 지정환 1984~2003

    1984~2003 전주교구 장애인사목 지도 신부

    유럽에서 다발성신경경화증 치료를 위해 3년의 시간을 보냈지만, 더 이상은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장애인 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1983년 긴 요양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요양 생활 중많은 시간을 프랑스의 한 나환자 마을에서 보냈다. 그곳에서는 의사와 간호사, 나환자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수용시설이 아니라 가족공동체라는 가르침을 얻게 되었다. 병으로 인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함께하는 가족적인 유대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가르침으로 1984년에 가족공동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전주시 인후동의 28평 전세 아파트에서, '가엾은 장애인고 봉사자가 아닌', 몸이 불편한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였다. 그와 헌신적 봉사자들의 노력이 세상에 알려졌고, 도움이 필요한 더 많은 중증장애인들이 함께 할 장소가 필요했다. 1985년 3월 휠체어 경사로와 장애인 전용화장실, 물리치료실을 갖추고 있던 천주교 사회복지회로 이전하면서, '무지개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장애인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었다. 무지개가족에 함께 했던 장애인들은 대부분 전신 마비 중증 지체부자유자들이었지만, 아주 작은 것이라도 스스로 할 수 있 는 것들을 찾아내도록 했다. 계속 된 독려 속에서 장애인들이 희망을 가지고 재활의지를 다잡게 하였다. 그런 재활의 노력 으로 결국에는 장애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다시 세상에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새로운 보금자리는 1989년 11월전북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에 의료실과 간호실을 갖춘 지하1층, 지상2층의 새로운 보금자리인 제1무지개가족의 집을 시작으로 1991년 10월에는 제2무지개가족의 집을 설립했다. 1999년에는 사회로 복 귀하는 훈련을 하는 독립된 원룸 형태의 자립관이 설립되었다. 이곳에서 가족으로 부터 외면 받고 세상 앞에 숨어 살아야 했던 수많은 장애인들이 스스로 장애를 인정하고 극복했으며,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일어설 수 있었다.

  • 계속된 봉사의 삶 - 지정환, 무지개 장학재단 2007~2019.4.13

    무지개장학재단 설립, 한국 교회사 디지털 작업 번역 참여, 선종

    농민들과 중증장애인들의 자립을 위해 1959년부터 실행한 그의 국적과 공로를 인정 하여, 2002년 호암재단은 제12회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수여했다. 최초로 임실에서 치즈 공장을 세우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킨 공로로 받게 되었다. 운영하면서, 장애인과 그 가족이 가난의 대물림에서 벗어나 자립을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장학재단 설립을 오랫동안 염원해왔고, 기부금으로 모아진 장학재단 설립 자금 5억원을 가지고 2007년 마침내 매년 두차례 장학금 수여식을 가지며, 장학생들 및 뜻을 함께 하는 있다. 법무부는 임실에 국내 최초의 치즈공장을 설립하는 등 한국 농촌의 중증장애인 재활센터인 무지개의 집을 설립하여 장애인의 자활에 헌신하는 등, 지정환 신부의 공을 인정하여 특별귀화허가로 대한민국 국적을 수여하였다. 부터는 임실치즈 & 식품연구소 연구원들과 함께 임실고추의 매운맛을 활용한 2018년 5월 매운치즈 개발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향년 88세로 지정환 신부가 선종하였다. 지정환신부의 '국민복지 향상 및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하여 2019년 4월 15일 이개호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통해 유족에게 전달했다. 한국에 와서 88세에 선종하기 까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속에서 함께 일관된 봉사의 삶을 산 지정환 신부는, '지도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겼다.